영화
유령신부
헤니히
2006. 1. 25. 03:10
사실 저는 팀 버튼 감독의 영화를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원래 영화를 그다지 많이 보는 편이 아니거든요. 요즘은 평소보다 많이 보는 편이지만 다른 분들에 비하면 택도 없을 만큼 별로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이 아닙니다.
유령신부에 대해서는 호평보다는 불평을 먼저 들어서 그다지 기대를 하지는 않았는데, 아니 이거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유쾌하고 발랄하고 깜찍하고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었지요. 뮤지컬 형식의 노래하는 장면도 좋았고, 빅터가 피아노를 치는 장면도 정말로 로맨틱했습니다. 동생과 열심히 감탄하면서 영화를 봤습니다.
그런데 제가 감탄 부분은 따로 있었어요. 그런 유쾌한 노래와 춤과 장면에 살짝 감추어진 같은자와 다른자, 보통 사람과 그들과는 달라서 소외받는자에 대한 대비가 그것이었습니다.
빅터는 일반인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유령신부는 일반인과는 확연하게 다른 편견속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미 죽었고, 몸이 반쯤 썩어 있으며, 눈알은 빠지고, 팔과 다리뼈는 골절되기 일쑤고, 심지어 두개골 안에 구더리도 한마리 키웁니다. 누구라도 두려워할 만한 무서운 모습이죠. 저는 처음 유령신부의 제목을 들었을 때 단순한 헐리우드 영화의 구조만을 생각하고는 유령신부와 잘못해서 결혼했기 떄문에 유령신부에게 쫒김을 당하다가 결국 그의 기지로 유령신부를 해치우는 이야기겠다고 생각해 버렸습니다. 저마저도 유령신부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살아있는 자들은 하나같이 부정적인 모습 뿐입니다. 귀족이 되기위해, 또 돈을 위해 자녀를 결혼시키는 탐욕스러운 부모들, 또 순진한 처녀를 꼬여내 살인하고 재물을 빼앗아 도망가는 남자, 융통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신부님. 그런 잿빛세상과는 달리 지하세계는 유쾌하기 짝이 없습니다. 비통하게 죽은 처녀를 응원하고 신입이 들어오면 따뜻하게 맞아주고, 생김새는 끔찍하지만 편견은 없는 오히려 땅위 세계보다 더 밝은 세계입니다.
단지 남편만을 믿고 따라온 유령신부를 먼저 배신한 것은 빅터였습니다. 부모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자는 꾀를 내어서 유령신부를 속인거지요. 거미 아주머니와 구더기군이 말한 것처럼 유령신부 에밀리는 단지 '살아있지 않다는것' 빼고는 마음씨 곱고, 미인이고, 피아노 솜씨도 뛰어난 꽤 괜찮은 신부감인 겁니다. '살아있고' '살아있지 않는'것들의 경계는 이 영화에서는 크게 무너집니다. 처음에는 두렵고 혐오스러운 존재였지만 알고보면 그들은 우리의 할아버지이며, 헤어진 배우자이고, 또 아끼고 키우던 강아지였고, 친구였습니다.
그 부분이 가장 잘 부각되어있던 것은 바로 빅터와 에밀리의 결혼식 장면입니다. 모두 다같이 빅터와 에밀리를 축하하기위해 교회로 갑니다. 죽은자들이 교회로 들어오다니 어불성설이죠. 보통 대치되는 관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교회의 신부님도 들어올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죽은자들은 말합니다. '교회잖아요?' 그들은 단지 숨이 끊어졌지만 신의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들도 결혼식을 할 땐 당연히 교회로 가야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죽은자와 산자와의 결합이 이루어 지려고 할 때 저는 진심으로 에밀리와 빅터를 응원했습니다. 하지만 에밀리는 그 진심만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빅터와 빅토리아를 맺어주고는 성불해버립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일반인과 그들과 다르기 때문에 소외받는 자와의 결합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단순히 영화의 공식 때문인지, 아니면 그들에게는 더도 덜도 말고 그에 대한 관심과 진심만이 필요 했던 것이라고 알려주기 위함이었는지 둘의 결합은 아쉽게도 무산되었습니다.
어쩄던 유령신부, 참 괜찮은 영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