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CS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73년도 영화버전
헤니히
2005. 7. 22. 03:06
봤습니다. 봤습니다.
예수님역의 테드 닐리는 정말 작은체구임에도 카리스마가 엄청나더군요.
강건하고 당당한 모습은 그야말로 우리가 알고있던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유다역의 칼 앤더슨씨는 73년도영화라서 화면도 침침하고 흑인분이라 표정같은것이 잘 보이지 않아서 섭섭했습니다만 나중엔 역시나 그런것이 장애가 되지 않을정도로 마음에 들어버렸습니다. 오버스러운 손짓같은것도 이제는 애교스럽게 보일지경입니다.
똑같은 작품인데도 이렇게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줄은 몰랐어요.
특히 시몬은 깜짝놀랄정도였습니다. 2000년도 영화나 한국판의 발랄한 미청년 버전 시몬을 보다가
반미치광이(으하하) 상태의 73년도 시몬을 보고 기절하는줄 알았습니다.
처음 봤을때는 옛날영화인지라 조금 촌스러운 연출이라고 생각했는데,
겟세마네 중간부분의 그로테스크한 성화들을 클로즈업한부분이나
마지막의 석양이지는 사막에 세워진 십자가를 보는 유다역의 배우의 모습을 비춰주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습니다.
극을 끝낸후 철수하면서 각자 버스에 타고 돌아가는데 하필 유다역의 배우가 석양이 지는 언덕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했던걸까... 이미 유다가 아닌, 하지만 유다역을 했던 한갓 배우인 보통사람의 눈에 비친 십자가는 어떤의미였을까요. 아마도 제가 이 작품을 보면서 내내 느꼈던 한가지 생각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지금 존재하는 우리들 모두가 사실 모두 유다가 될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유다의 시각을 중심으로 한 이 작품내에서 유다란 존재는 매우 미묘합니다. 분명 비난받아 마땅한인물이고 실제로도 2000년간이나 모든 크리스챤의 비난을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내에서 데가 유다를 보며 느낀것은 비난이 아닌 '연민'이었습니다.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사랑하는 예수를 팔아넘겨 버린 유다가 후회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제 자신은 딱잘라 '그러게 왜그랬어, 나쁜놈'이라고 비난하거나 냉소하지는 못하겠더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도 유다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연민'과 '사랑'은 조금 다릅니다. 유다를 생각하면 슬프지만 그 행위를 잘했다고 할수는 없는일이지요. 사랑할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무래도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차이일 수도 있는데, 나쁜남자를 사랑할 수는 있지만 유다의 경우는 다릅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른 '배신자'지요. 자신을 배신할것을 알면서도 유다를 걱정하는 그분때문에 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문득, 2000년도 판의 그장면이 생각납니다. 문둥병자들의 소굴에서 하나하나, 소중하게 안고 슬퍼하시는 그분의 모습, 자신을 팔아넘기는 유다를 마지막으로 안아주시는 모습. 그런것이야말로 신의 아들이자 인간인 예수님의 본질일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분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신이자 인간으로서 인간을 사랑하셨기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이해자,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대변자, 우리가 인간이기에 저지르는 죄를 불쌍하게 여겨주시는 분.
이 작품이 크리스챤에게 있어 논란이 되고있는것을 압니다.
예수님의 인간적인면을 굉장히 부각시켰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저는 이 작품을 절대 반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크리스챤에게 권해주고싶습니다. 겨우 그런것에 겁먹지 말라고 하고 싶어요.
여기저기 적극적으로 부딛쳐서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얻자고 이야기 하고 싶어요.
지금의 제 모습, 스스로도 그다지 나쁘지 않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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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런데 제가 2000년도 판을 먼저 봐서 그런지 몰라도 그쪽이 상당히 마음에 듭니다.
일단 유다의 연기가 최강이구요! 예수님의 모습도 나약하다기보다 슬픔의 묘사가 더 두드러졌다는 생각입니다.
(일단 유다나 문둥병자를 안아주시는장면에 마음을 빼았겨버렸기 때문일까요)
아이, 그냥 제 개인적인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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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작품이 '부활'이 없다는 이유로 기독교인의 비난을 받는다는것에 대해
아니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엄연히 '수난곡'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수난곡'이란 예수님이 예루살렘입성으로부터 십자가에서 돌아가실때까지의 일주일간을 묘사한 곡이며,
고난주간에 연주되도록 되어있습니다.
유명한 바흐의 '마태수난곡'의 경우에도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끝을 맺고 있으며,
절대 부활의 '부'자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디 '마태수난곡'을 '부활'이 없다고 불경하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고난주간에는 예수님이 고난을 받아 돌아가셨다는것을 기억하며 슬퍼하는 기간이지,
부활을 기뻐하는 주간이 아닙니다.
제 생각엔 우리나라에서만 유독 '부활'이 들어간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공연했다는것은
우리나라의 기독교의 문화가 짧고 빈약하다는데 있다고 봅니다. 일종의 몰이해지요.
이 작품은 유럽권인 영국의 작곡가가 만든작품이고,
유럽권나라들은 오래된 카톨릭문화가 저변에 깔려있었다는것을 생각해봐야합니다.
예를들면, 장황하고 긴 수난곡을 길거리에서 연주하고, 끝나고도 박수가 아닌, '아멘'이라는 소리만으로 끝난후 일상생활로 돌아가는 유럽인들과의 차이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매우 틀려있다거나 유럽인들을 따라해야한다고 주장하는것은 아닙니다.
그저 '부활'이 없다고 그 작품을 비난부터 하는것은 조금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는것입니다.
예수님역의 테드 닐리는 정말 작은체구임에도 카리스마가 엄청나더군요.
강건하고 당당한 모습은 그야말로 우리가 알고있던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유다역의 칼 앤더슨씨는 73년도영화라서 화면도 침침하고 흑인분이라 표정같은것이 잘 보이지 않아서 섭섭했습니다만 나중엔 역시나 그런것이 장애가 되지 않을정도로 마음에 들어버렸습니다. 오버스러운 손짓같은것도 이제는 애교스럽게 보일지경입니다.
똑같은 작품인데도 이렇게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줄은 몰랐어요.
특히 시몬은 깜짝놀랄정도였습니다. 2000년도 영화나 한국판의 발랄한 미청년 버전 시몬을 보다가
반미치광이(으하하) 상태의 73년도 시몬을 보고 기절하는줄 알았습니다.
처음 봤을때는 옛날영화인지라 조금 촌스러운 연출이라고 생각했는데,
겟세마네 중간부분의 그로테스크한 성화들을 클로즈업한부분이나
마지막의 석양이지는 사막에 세워진 십자가를 보는 유다역의 배우의 모습을 비춰주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습니다.
극을 끝낸후 철수하면서 각자 버스에 타고 돌아가는데 하필 유다역의 배우가 석양이 지는 언덕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했던걸까... 이미 유다가 아닌, 하지만 유다역을 했던 한갓 배우인 보통사람의 눈에 비친 십자가는 어떤의미였을까요. 아마도 제가 이 작품을 보면서 내내 느꼈던 한가지 생각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지금 존재하는 우리들 모두가 사실 모두 유다가 될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유다의 시각을 중심으로 한 이 작품내에서 유다란 존재는 매우 미묘합니다. 분명 비난받아 마땅한인물이고 실제로도 2000년간이나 모든 크리스챤의 비난을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내에서 데가 유다를 보며 느낀것은 비난이 아닌 '연민'이었습니다.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사랑하는 예수를 팔아넘겨 버린 유다가 후회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제 자신은 딱잘라 '그러게 왜그랬어, 나쁜놈'이라고 비난하거나 냉소하지는 못하겠더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도 유다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연민'과 '사랑'은 조금 다릅니다. 유다를 생각하면 슬프지만 그 행위를 잘했다고 할수는 없는일이지요. 사랑할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무래도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차이일 수도 있는데, 나쁜남자를 사랑할 수는 있지만 유다의 경우는 다릅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른 '배신자'지요. 자신을 배신할것을 알면서도 유다를 걱정하는 그분때문에 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문득, 2000년도 판의 그장면이 생각납니다. 문둥병자들의 소굴에서 하나하나, 소중하게 안고 슬퍼하시는 그분의 모습, 자신을 팔아넘기는 유다를 마지막으로 안아주시는 모습. 그런것이야말로 신의 아들이자 인간인 예수님의 본질일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분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신이자 인간으로서 인간을 사랑하셨기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이해자,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대변자, 우리가 인간이기에 저지르는 죄를 불쌍하게 여겨주시는 분.
이 작품이 크리스챤에게 있어 논란이 되고있는것을 압니다.
예수님의 인간적인면을 굉장히 부각시켰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저는 이 작품을 절대 반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크리스챤에게 권해주고싶습니다. 겨우 그런것에 겁먹지 말라고 하고 싶어요.
여기저기 적극적으로 부딛쳐서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얻자고 이야기 하고 싶어요.
지금의 제 모습, 스스로도 그다지 나쁘지 않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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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런데 제가 2000년도 판을 먼저 봐서 그런지 몰라도 그쪽이 상당히 마음에 듭니다.
일단 유다의 연기가 최강이구요! 예수님의 모습도 나약하다기보다 슬픔의 묘사가 더 두드러졌다는 생각입니다.
(일단 유다나 문둥병자를 안아주시는장면에 마음을 빼았겨버렸기 때문일까요)
아이, 그냥 제 개인적인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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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작품이 '부활'이 없다는 이유로 기독교인의 비난을 받는다는것에 대해
아니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엄연히 '수난곡'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수난곡'이란 예수님이 예루살렘입성으로부터 십자가에서 돌아가실때까지의 일주일간을 묘사한 곡이며,
고난주간에 연주되도록 되어있습니다.
유명한 바흐의 '마태수난곡'의 경우에도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끝을 맺고 있으며,
절대 부활의 '부'자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디 '마태수난곡'을 '부활'이 없다고 불경하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고난주간에는 예수님이 고난을 받아 돌아가셨다는것을 기억하며 슬퍼하는 기간이지,
부활을 기뻐하는 주간이 아닙니다.
제 생각엔 우리나라에서만 유독 '부활'이 들어간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공연했다는것은
우리나라의 기독교의 문화가 짧고 빈약하다는데 있다고 봅니다. 일종의 몰이해지요.
이 작품은 유럽권인 영국의 작곡가가 만든작품이고,
유럽권나라들은 오래된 카톨릭문화가 저변에 깔려있었다는것을 생각해봐야합니다.
예를들면, 장황하고 긴 수난곡을 길거리에서 연주하고, 끝나고도 박수가 아닌, '아멘'이라는 소리만으로 끝난후 일상생활로 돌아가는 유럽인들과의 차이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매우 틀려있다거나 유럽인들을 따라해야한다고 주장하는것은 아닙니다.
그저 '부활'이 없다고 그 작품을 비난부터 하는것은 조금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는것입니다.